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타람 술탄국 (문단 편집) === 초기 === 마타람 술탄국을 세운 창업 군주는 [[인도네시아/역사#드막 술탄국|드막 술탄국]]의 마지막 군주 아랴 프낭상의 암살자 수타위자야(Sutawijaya)였다. 수타위자야는 친아버지 키 아긍 파마나한(Ki Ageng Pamanahan, [[마자파힛 제국]] 라자사 황가의 후손이라고 일부 연대기가 주장함)[* 드막 붕괴 직전, 하디위자야가 드막 군주 아랴 프낭상과 반목할 때 하디위자야 편에 서서 하디위자야를 도왔으며, 그 공로로 마타람 지역의 통치권을 받았다. 마타람 왕(파늠바한)국 수립 이전의 통치자이기는 하지만, 간혹 마타람 술탄국의 군주를 언급할 때 파늠바한 세나파티 이전 초대 군주로 간주하기도 한다.]이 영주로 다스리던 [[욕야카르타]] 인근 마타람 지역을 1575년 물려받아 다스리며, 인접한 파장([[수라카르타]] 인근)을 중심으로 하는 [[인도네시아/역사#파장 왕국|파장 왕국]](1568–1587) 산하에 있었다. 그러나 수타위자야가 점차 독립적인 행보를 취하며 파장의 왕 하디위자야(Hadiwijaya)와 수타위자야의 사이는 점점 나빠졌고, 양 세력의 전쟁까지 발발하였으나 파장군이 마타람을 침공하다 격퇴되었다. 하디위자야 사후, 수타위자야는 파장의 계승 문제에 개입하여 파장을 약화시키고 궁극적으로 파장 산하의 드막 지역과 함께 마타람에 합병하였다. 이렇게 파장, 마타람, 드막을 통합한 수타위자야가 왕위(파늠바한Panembahan)를 칭하고 '파늠바한 세나파티'(Panembahan Sénapati, 재위 1587–1601)로서 1587년에 즉위하여 마타람 왕국을 개창하였다. 파늠바한 세나파티가 아직 수타위자야로서 파장 산하에 있을 때, 남해의 여신 [[냐이 라라 키둘]](Nyai Rara Kidul)[* 자바어 현대 마타람 방언 및 [[인도네시아어]] 발음은 '냐이 로로 키둘'(Nyai Roro Kidul)이다. 간혹 'Nyai Lara Kidul', 'Nyai Loro Kidul'이라는 표기도 사용된다.]이 수타위자야를 만났는데, 잘생긴 수타위자야와 사랑에 빠져 그를 정치적으로 조력했다는 자바의 전설이 있다. 이 냐이 라라 키둘 전설은 이후에도 이어져, 냐이 라라 키둘은 오늘날까지도 마타람과 [[욕야카르타]] 술탄가의 수호신이자, 마타람/욕야카르타 군주들의 상징적 배우자로 여기는 관습이 있다.[* 이와 같은 '상징적 배우자' 관념은 오늘날(2021년 1월 기준) 술타나(여성 술탄)가 즉위할 가능성이 높은 욕야카르타 지역에서 술타나 계승에 걸림돌이 된다. 냐이 라라 키둘을 단순히 미신이자 상징에 불과하다고 평가 절하할 수 있고 실제로 많은 자바인들도 극단적 전통주의자를 제외하면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현대 자바에서도 남해의 여신 전승은 전통 문화 전반에 스며들어 있고, 여러 문화 요소에서 '여신'인 냐이 라라 키둘에 관한 한 욕야카르타 술탄을 '남성'으로 상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즉, 이는 단순히 여신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자바 문화에서 술탄의 속성이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한편 욕야카르타가 인도네시아에서 비교적 진보적인 지역이라고는 하나 아직 [[동성결혼]]을 두고 지역 사회에서 반발하는 이들이 많다.] 파늠바한 세나파티는 파장과 드막을 병합한 후에도 적극적인 팽창 정책을 펼쳐, 당시 드막 술탄국의 붕괴 이후 여러 소국들이 난립하던 중부·동부 자바 각지로 마타람의 영토를 확장하고, 넓은 영토를 바탕으로 왕국의 기틀을 다졌다. 여러 지역은 원정에서 승리하여 병합되었지만, 파티(Pati, 자바 중북부) 지역처럼 마타람에 자발적으로 귀부해 온 경우도 있었다. 이때 마타람과 유사하게 동부를 점차 통합하고 각지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는 [[인도네시아/역사#수라바야 공국|수라바야 공국]] 세력이 마타람의 경쟁자가 되었다. 1590년 수라바야의 조력을 받는 [[마디운]]을 공격해 점령한 파늠바한 세나파티는 1591년 [[크디리]]의 계승 분쟁에 개입하여 한 파벌을 지원하였으나, 수라바야에서 지원받는 반대 파벌이 계승 분쟁에서 승리하여 크디리에서는 물러나야 했다. 1599년, 파늠바한 세나파티는 자바 북부의 주요 항구 [[즈파라]](Jepara)를 보유한 [[인도네시아/역사#칼리냐맛 왕국|칼리냐맛 왕국]]을 공격해 합병하였다. 1600년, 자발적으로 귀순했던 파티의 공작 프라골라 1세(Pragola I)가 마타람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으나 파늠바한 세나파티가 이끄는 마타람군이 진압하였다. 파늠바한 세나파티를 계승하여 마타람의 2대 군주가 된 것은 태자였던 파늠바한 세나파티의 아들 졸랑(Raden Mas Jolang)으로, 그의 왕호는 파늠바한 하냐크라와티(Panembahan Hanyakrawati, 재위 1601–1613)였다. 그러나 파늠바한 하냐크라와티의 치세 전반은 형이었던 푸그르 공(Pangeran Puger, Raden Mas Kentol Kejuron)과의 권력 투쟁으로 얼룩졌다. 푸그르 공은 파늠바한 하냐크라와티보다 나이가 많은 자신이 마타람 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1602년 영지 드막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발생한 마타람 최초의 왕위 계승 전쟁은 1605년까지 이어졌으며, 결국 파늠바한 하냐크라와티가 승리하고 패배한 푸그르 공은 체포되어 [[쿠두스]](Kudus)로 유배되었다. 치세 후반인 1610년 무렵부터 파늠바한 하냐크라와티는 부왕이 펼쳤던 수라바야와의 대결 정책을 재개하였고, 1613년에는 파늠바한 하냐크라와티의 마타람군이 수라바야를 침공하였으나 함락에는 실패하였다. 수라바야 침공 과정에서 수라바야 산하 [[그레식]](Gresik)에 있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상관이 불탔는데, 파늠바한 하냐크라와티는 당시 특별히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와 적대하려는 생각이 없었으므로 사과하고, 대신 자신의 세력권인 즈파라에 새로운 동인도 회사 상관을 개설할 수 있도록 허가하였다. 1613년, 파늠바한 하냐크라와티는 크라퍅(Krapyak) 숲에서 [[사슴]] 사냥을 하다가 사고로 사망하였다. 마타람의 왕위는 아들 랑상(Mas Rangsang), 즉 후일의 [[술탄 아궁]]이 파늠바한 하냐크라쿠수마(Panembahan Hanyakrakusuma)로서 계승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